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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_책

시지프의 신화

gunhee's 2024. 10. 9. 11:21

목차



     
    시지프의 신화
    1942년 소설 <이방인>의 발표와 함께 문학적 성공을 약속받은, 알베르 카뮈의 장편 소설 『시지프의 신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량한 폐허에서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간파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부조리를 제시한 저자의 사상이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난 소설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생각과 삶을 지탱해주는 최초의 바탕이면서, 최후의 논리적, 미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도달점인 부조리로부터 자유, 반항, 정열 등 이 세 결과를 이끌어내고, 그것들을 최대한으로 느낌으로써 인간은 삶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음을 강조한다.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올리도록 저주받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 시지프를 통해 현대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알베르 카뮈
    출판
    문예출판사
    출판일
    2001.07.25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

     

    굿바이 카뮈? 그런 의문과 함께 책을 손에 든 독자도 있을 듯싶다. 사실 카뮈와 작별인사를 하려면 먼저 카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카뮈인가? 당신은 카뮈를 만난 적이 있는지? <이방인>의 작가, <시지프 신화>의 저자 알베르 카뮈 말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자살이야말로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고. 그것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다급한 문제 제기였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젊은 카뮈는 말했다. 누구에게? 젊은 우리에게!

     

     

     

    돌이켜보면 80년대 중반, 우리는 젊었다. <굿바이 카뮈>의 저자 이윤과는 책으로만 대면했을 뿐이지만, 80년대 중반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었다는 고백으로 보아 비슷한 연배이고 같은 세대다. ‘우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면, 우리의 청춘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최루탄이 터지던 교정과 거리에서 꽃이 피는 듯 마는 듯 지나가버렸다. 스러지기도 하고 밟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청춘의 고민’마저 생략할 수는 없었다. 왜 사느냐는 것. 요즘에야 알게 됐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질문을 세 번쯤 던진다. 갓 스무 살이 될 무렵에, 중년에, 그리고 노년에. 저자 또한 이렇게 말한다. “80년대 중반 내가 철학과를 지망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1라운드’이다.

     

    철학 대신에 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첫 학기에 문학개론과 함께 철학개론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수강과목으로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개론은 나중에 종교학개론으로 변경해서 신청하긴 했다. 이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줄 듯싶어서였다. 왜 사는지에 대해서. 고민도 심하면 병이다. 친구에게 “너는 왜 죽지 않니?”라고 물었던 걸 보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한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유한한 삶이라면 인생이 허무했다. 아니 허무해보였다. 학생생활연구소에 상담을 받으러 다니며 세계의 ‘원초적 적의’에 대해서 떠들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신은 혹 이런 문장들에 매혹된 적이 있는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점심식사, 전차, 네 시간의 근무, 저녁식사, 취침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수월하게 계속된다. 다만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모든 것은 놀라움을 띤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사무실에 다닌 것도, 공장에 다닌 것도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대학 강의실에 출석하는 정도였지만, 내게도 ‘왜’라는 의문은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문제와 조우한 첫 번째 장면일 듯싶다. 우리는 카뮈와 그렇게 만났다.

     

    청춘의 열병을 앓아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골몰할 수 있다. 하지만 병적인 집착은 다른 문제다. 왜 하필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됐을까. 아무래도 그 무렵의 ‘일부’ 고등학생들에게 카뮈나 사르트르가 끼친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맞는 말이다. 그 ‘일부’에 나도 포함됐던 것이고. 우리는 어쩌면 실존주의 세례를 입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카뮈와 사르트를 읽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상경할 때 가방에 <시지프 신화>와 함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챙기던 세대 말이다. 아무튼 그랬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존재’ ‘무’ ‘부조리’ ‘구토’ ‘실존’ ‘책임’ 같은 유행어들이 치어들처럼 헤집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한 세월이 지났다. 그 치어들이 이젠 좀 묵직해졌을까. 저자는 학부를 끝으로 철학 공부를 접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형이상학적 문제 대신에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씨름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니 ‘의미’니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고민했던 문제를 좀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 스키너를 읽고, 푸코를 읽고, 도킨스를 읽었다. 진화심리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을 읽었다. 나는 인간이 어디까지 부자유한가, 그래서 어디서부터 자유로운가를 알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생활의 문제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고 직업을 가지겠다는 생각은 아주 뒷전이었다. 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부터가 이런 앎의 욕구 때문이었으니 인생의 문제 주변을 내내 맴돌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인생의 의미(Meaning of Life)’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에 해제를 붙였다. 공역자였던 이윤의 ‘옮긴이의 말’을 유심히 읽고, 예사로운 공력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굿바이 카뮈>를 들고 나타났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오랜 갈증과 탐문을 ‘철학함’의 자세로 정리한 책이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제쳐놓았다고는 하지만 철학에 대한 녹슬지 않은 관심과 예리한 논리로 무장하고서 ‘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을 안내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중년의 관심을 ‘제2라운드’라고 하면, 이 책은 그 제2라운드의 결과보고서이다. 그가 도달한 ‘만족스런 답변’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더 큰 객관적 가치를 향한 자기초월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삶의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 자기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굿바이 카뮈’란 말이 뜻하는 것은 카뮈란 말로 상징되는 철학적 고민과의 작별이다. 바로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의 작별이다. 이 문제를 두고 저자는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은 개념의 명료화를 지향했던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영향에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분석철학에서는 보통 삶의 의미와 같은 실존주의적 물음을 문제로 성립할 수 없는, 되지도 않는 문제로 기각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논리를 지렛대로 삼아서 삶의 의미라는 바위, 매번 다시 굴러 떨어지던 시지프스의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고자 한다. 저자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스무 살에 이 정도로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면, 굳이 철학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핏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했다고 자부한 비트겐슈타인의 자신감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를 보는 다른 시각도 물론 가능하다. 가령 삶의 의미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아니 행위이고 운동이며 실천 자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제3자적 시점에서 인식과 평가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주관적 시점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고유한 ‘자유’와 ‘의미’를 정량적이고 범주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인식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유와 의미는 파닥파닥 뛰는 ‘생생한’ 자유, ‘살아있는’ 의미가 아니다. ‘유레카!’라는 발견의 기쁨이나 우리가 각자 삶의 어느 순간 체험하는 환희가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지 않거나 미흡하게만 전달되는 이유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의 씨름, ‘제2라운드’를 눈여겨본 소감을 적자면, 이 씨름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굿바이 카뮈>의 ‘의미’는 저자가 도달한 결론보다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듯싶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란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일부’이긴 하더라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뭔가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저자의 ‘생각여행’에 동행하면서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의문이 다 해소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가 되면 다시 가방을 싸고 신발끈을 바짝 묶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노년에, 그러니까 ‘제3라운드’에서 한 번 더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새겨지는 별들을 이제 다 세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이제는 적지 못한다. 우리의 청춘은 지나갔다. 굿바이 청춘!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 다하지 않는 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 또한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카뮈와 작별하고도 인생은 한동안, 어쩌면 오래 더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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